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경북나드리

    통합검색
    어서오이소! 경북 천년의 문화, 천혜의 자원
    안동 예禮와 충忠 사랑의 고장
    조회수165 좋아요수2
     
    예禮와 충忠 사랑의 고장 안동 ;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걷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불리는 안동, ‘안동’이라는 지명은 후삼국시대 성주였던 삼태사(김선평, 권행, 장정필)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병산전투에서 견훤을 물리치고 고려가 삼국 통일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여 930년, 고창군을 ‘대동의 안전을 보장하는 곳’이란 뜻을 가진 ‘안어대동(安於大東)’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합니다.
    안동은 삼다(三多)와 삼무(三無)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많은 것 세 가지와 없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산과 사람, 서원이 많습니다. 행정구역상 들판보다 산이 많다고 하며, 학문과 예절이 바른 어진선비와 명현석학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있습니다.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는데, 만석거부(萬石巨富)가 없답니다. ‘양반은 대추 하나로 요기한다.’는 속담처럼 어진선비들만 사는 곳으로 물욕(物慾)이 없으며, 산이 많고 들이 적으니 부자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송덕비도 없다고 합니다. 송덕비는 고을에 부임한 관리가 임무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떠난 뒤 고을사람들이 그 분의 업적을 찬양하여 세웁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수령이 조정의 명을 받아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니 송덕비를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고을의 향리(아전, 하급관리)는 성내에 거주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일과가 끝나면 곧바로 퇴청하여 마을의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며 여론을 듣고 다음날 사또에게 백성들의 실상을 전해주어 목민관의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과연 ‘정신문화의 수도’라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 하회마을권역을 둘러보고 안동댐주변을 다녀왔습니다. 먼저 병산서원을 찾았습니다. '병산屛山' 은 서원 앞 흐르는 낙동강을 산이 마치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고 하여 명명되었습니다.


    ▲ 병산서원 입구 (좌) / 병산서원 가는 길 (우)

    비포장도로 2.7km를 들어갔습니다. 울퉁불퉁 휘어진 길을 돌아가는 길, 참 소중한  길이었습니다. 포장된 도로를 빨리 달리는 것과 비교하면 느리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나는 이런 길이 좋습니다. 옛 선조들이 걸어왔던 길, 흙 한줌, 돌멩이 하나, 오래된 은행나무와 소나무,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병풍처럼 펼쳐져있는 바위들, 그리고 파란하늘이 그냥 좋았습니다. 뒤퉁뒤퉁 비틀비틀 거리며 도착한 주차장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열 체크를 하고 이름을 적고서야 서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약300미터 걸어 서원에 당도했습니다.


    ▲ 병산서원 전경 (좌) / 복례문 (우)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된 병산서원입니다. 1979년 사적 제260호 지정되었으며, 2010년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어서 2019년 한국의 9개 서원 연속유산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소중한 문화재입니다.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고려 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민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에서 유생들이 난리 중인데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토지 따위를 하사하여 더욱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당 근처에 가구 수가 늘고 길이 생기면서 다소 부산해지자 유림들이 서당을 옮기기로 의논하고 장소를 물색하였습니다. 마침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어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논의하니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였습니다.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일컬어 오늘날까지 이어옵니다.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습니다. 1863년(철종14) 사액을 받았으며, 1868(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입니다.
    솟을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복례문復禮門입니다. 서원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옆면1칸 입니다. ‘복례’는 [논어]의 <안연顏淵>편에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자신의 사욕을 이겨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실행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자신의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간다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할 것이다.‘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욕망과 탐욕의 유혹을 이겨내고 예로서 자신을 절제하여 인(어짊)을 이룩하라는 의미를 지닌 문입니다. 문의 이름을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몸을 낮추어 서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복례문을 들어가니 우뚝 솟은 만대루 왼편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광영지입니다. ‘광영지(光影池)’는 주희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글 읽는 즐거움> 일부를 인용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半畝方塘一鑑開(반무방당일감개)조그마한 연못은 거울 같아서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닌다,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묻건대 어찌하야 그리 맑은 고
    爲有原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끝없이 샘물 솟아 그렇더란다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형태로 만든 연못입니다. ‘천원지방’은 우리나라 전통 연못 조성의 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땅을 상징하는 네모 모양의 연못가운데에 둔 셈입니다. 아담한 연못이지만 서원 속의 정원으로 여길만했습니다. 배롱나무 꽃이 연못 속으로 떨어지면 연못은 온통 꽃으로 장식되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 광영지 (좌) /  만대루 (우)

    만대루(晩對樓)는 두보(杜甫 701-762)와 주희(朱熹 1,130-1,200)의 시에서 인용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당나라 시인두보가 삼국지의 유비가 최후를 맞은 곳으로 유명한 백제성 절벽위의 누대를 바라보면서 지은 시<白帝城樓(백제성루)>의 ‘翠屏宜晚對(취병의만대):푸른 절벽은 늦을 녘에 마주 대할 만하고, 白谷會深遊(백곡회심유):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주희의 시<만대정(晩對亭)>에서 인용했다고도 전합니다. 

    倚笻南山巓(기공남산전):지팡이에 의지해 남산에 오르니
    卻立有晩對(각입유만대):멀리 만대봉이 있네
    蒼峭矗寒空(창초촉한공):가파르고 가파른 모습 차가운 하늘에 우뚝한데
    落日明影翠(낙일명영취):지는 해는 푸른 절벽을 비추네,

    7칸의 긴 누마루 건물로 낙동강 하얀 백사장과 병산 풍경을 7폭 병풍에 담아내는 듯한 병산서원 최고의 건물입니다. 아래층은 막돌기단, 덤벙주초, 휘어진 굵은 기둥이 위층은 잘 다듬은 둥근기둥이며, 우물마루, 계자난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만대루 위에는 올라갈 수 없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으니 함부로 발을 디디면 안 될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임이 인정된 건물입니다. 만대루 아래를 통과하여 서원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입교당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 입교당

    입교당(立敎堂)은 ‘병산서원’ 현판이 있으며 서원 중앙에 위치하여 중심적 역할을 합니다. 또한 유생이 직접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강학당입니다. 정면 5칸 옆면 2칸이며 정면 처마 밑에 서원현판이 걸려있었습니다.
     ‘立敎’는 『小學』 立敎편에서 ‘하늘로 부여받은 착한 본성에 따라 인간윤리를 닦아가는 가르침을 바르게 세운다.’는 뜻에서 인용했습니다. 성현의 가르침인 오륜(五倫)을 바르게 세우며, 그 가르침을 본받아 자기의 몸을 바로 세우고 나아가 선비로서의 사명을 바로 세우는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동쪽 방은 明誠齋(명성재), 서쪽 방은 敬義齋(경의재)입니다. 명성재는 원장실에 해당되며 『중용』21장 ‘自明誠 謂之敎~明則誠矣(자명성 위지교~명즉성의)’에서 인용한 말이다. ‘밝음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짐을 가르침이라 하니…, 밝아지면 성실해 진다’.는 뜻입니다. 경의재는 부원장이나 유사가 사용합니다. ‘敬義’는 『주역』「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군자는 경건함으로 내 마음을 곧게 하고 올바름으로 내 행동을 반듯하게 합니다. 敬以直內 義以方外(군자 경이직내 의이방외)〕”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병산서원 (좌) / 명성재 (중) / 경의재 (우)

       동재(東齋):동직재(動直齋)와 서재(西齋):정허재(靜虛齋)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있습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크기가 똑같은 방2개와 마루1칸으로 되어있습니다. 유생(제관)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건물이며 정면4칸, 옆면1칸 반입니다. 강당 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입니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습니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습니다.


    ▲ 입교당에서 만대루

    ▲ 동재와 만대루 (좌) / 서재와 만대루 (우)

    입교당에서 만대루를 바라보니 나지막한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11월의 서원은 고요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한참을 앉아 학문을 닦고 토론을 하던 선현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분주하게 때로는 고요하게 예를 갖추며 생활하던 선비들의 옷자락이 펄럭이는 듯했습니다. 입교당을 돌아 존덕사로 향했습니다. 신문(神門)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문(神門)은 서원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합니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액운을 막고 있었습니다. 혼령과 제물이 드나드는 가운데 문, 제관과 유생들이 드나드는 동문, 가장 높은 분과 낮은 사람이 드나드는 서문으로 구분됩니다. 일반적으로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하여 동쪽 문으로 들어가서 서쪽 문으로 나오지만 병산서원에는 동쪽 문으로 들어갔다가 동쪽 문으로 나옵니다. 신분이 가장 높지도 아니하고 가장 낮지도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 위에는 홍살을 설치하여 사당 입구임을 표시하며 4개의 초석에 서애선생의 일생을 표현한 주역의 팔괘가 2개씩 그려져 있었습니다.


    ▲ 신문 (좌) / 존덕사 (우)

    존덕사(尊德祠)는 서애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우러른다.”는 뜻에서 존덕사라 하였답니다. 중용 27장 君子(군자) 尊德性而道問學(존덕성이도문학)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고 묻고 배움을 길로 삼는다’ 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이곳은 위판을 모셔둔 사당으로 묘우는 삼문으로 되어 있고 정면3칸 옆면1칸의 건물입니다. 존덕사에 올라가는 문도 삼문으로 된 신문입니다. 문에는 태극문양, 기둥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과 수암 류진(修巖 柳袗 1582-1635)을 배향합니다. 서애 선생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1542년(중종37) 의성현 사촌리 서림 외가에서 류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 관직을 역임하였습니다. 1598년(선조31)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향리에서 후학양성에 힘썼으며, 1604년(선조37) 호성공신이 되어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지기도 했습니다.
    서애 선생은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관화록(觀化錄), 운암잡기(雲巖雜記), 난후잡록(亂後雜錄), 상례고증(喪禮考證), 무오당보(戊午黨報), 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있고, 편저로는 대학연의초(大學演義抄), 황화집(皇華集), 구경연의(九經衍義), 문산집(文山集), 정충록, 포은집, 퇴계집, 효경대의(孝經大義), 퇴계선생연보 등이 있습니다. [서애집]과 [징비록](국보 제132호)은 임진왜란 연구에 귀중한 사료입니다.
    선생은 1614년(광해군6) 병산서원 존덕사(尊德祠)에 제향(祭享)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주 도남서원, 의성의 빙계서원, 군위의 남계서원, 예천의 삼강서원에 제향(祭享)되었습니다.
    수암 류진(修巖 柳袗 1582-1635)은 서애선생의 셋째 아들이자 문하생으로 가성(家聲)을 찬양한 선비였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계화(季華)요 호는 수암(修巖)입니다. 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습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대표 저서로는 ?수암집?이 전합니다. 1662(현종 3)년 존덕사에 배향되었습니다. 향사는 음력3월과 9월초 정(丁)일에 올립니다.
    장판각과 전사청을 둘러보고 주사(廚舍) 앞에 있는 달팽이뒷간도 보았습니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이 달팽이를 닮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출입문이 없어도 안에 있는 사람이 밖으로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지붕이 없는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였다고 전합니다. 400여 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합니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260호(1978년)로 지정되었습니다. 2003년 보수하여 지금에 이릅니다.


    ▲ 달팽이뒷간

    달팽이뒷간을 뒤로 하고 서원을 나와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갔습니다. 강물을 따라 곧장 가면 하회마을에 이릅니다. 걷고 싶은 길입니다. 옛 선비들은 강물을 따라 걸어서 하회마을로 다녔을 것입니다. 다음에 오면 꼭 이 길을 걸어봐야겠습니다. 아쉬움을 남기고 하회마을로 이동했습니다.


    ▲ 하회마을 길

    Info. 병산서원
    주 소 :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 
    홈페이지 : http://www.byeongsan.net

       조선여인의 마음으로 걸어보는 하회마을

    이 마을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집성촌이며, 기와집과 초가가 오랜 기간 동안 잘 보존된 곳입니다. 특히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류운룡 선생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 형제가 자라난 곳이기도 합니다.
    ‘하회(河回)’라고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데서 유래되었습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해당하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습니다.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우리나라의 열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은 가까웠습니다. 자동차로 10분도 채 소요되지 않았습니다. 주차를 한 후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구입하여 셔틀버스를 타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셔틀버스는 10분 간격으로 자주 운행되며 소요시간은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종합안내소 앞 <세계유산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 표지석이 듬직했습니다. 마을을 둘러보려면 걸어서 약 1시간30분 정도 소요됩니다. 전동차를 빌려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마을안내도를 들고 보물을 찾듯이 좁다란 마을길로 다녔습니다. 관람코스 번호를 따라 다니면 가장 효율적입니다. 하회마을 안내판에서 마을 전경과 안내문을 읽어 본 후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 하회마을 초입 (좌) / 하회마을 안내문 (우)

    염행당(남촌댁)을 만났습니다. 류치목(1771~1836)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90호입니다. 처음에는 단출하게 지었는데, 그의 증손자인 류영우가 1905년에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1954년에 불이 나서 안채, 사랑채와 후대에 지은 작은 사랑채가 소실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모습이었습니다.
    여행객을 만났습니다. 어린 딸아이와 함께 온 가족이 마당에 머무는 가을햇살 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먼 훗날 아이들이 자라서 이날을 기억할까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새들의 노랫소리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집을 나서자 마당이 더 고요해졌습니다. 나도 집을 둘러본 후 마당을 나와 골목길을 돌아 양오당이 왔습니다.
    양오당(주일재)(국가민속문화재 제91호)은 부호군 류만하(1624~1711)가 충효당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그의 아들 주일재 류후장이 증축하였습니다. 이 집은 사랑채, 문간채, 안채, 일각문과 마주하고 사당이 있는 전형적인 전통가옥입니다. 대문 앞 안팎을 가리는 아담한 내외담은 조선시대 남녀유별의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젊은 연인이 이집을 들러보러 왔습니다. 마루에는 무말랭이가 햇살을 가득 머금으며 꾸덕꾸덕 마르고 있었습니다.


    ▲ 염행당 (좌) / 양오당 (우)

    양오당을 나와 전동차를 운전해서 골목을 나오는데 지붕을 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릴 적 이맘때 쯤 이면 가을 추수한 후 볏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지붕을 이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최근에는 그런 광경은 매우 보기 힘듭니다. 묵은 이엉을 거두어 내리고 새로 만든 이엉으로 지붕을 산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지붕이 산뜻해졌으니 이집에 사는 사람도 더 맑고 새롭고 환한 일만 펼쳐질 것이라 믿어봅니다.


    ▲ 지붕이는 모습

    지붕 이는 광경을 구경하고 골목길을 돌아가 작천고택에 이르렀습니다. 작천고택은 국가민속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된 집이다. 건물의 건축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처음에는 두 채였으나 1934년 대홍수로 문간채가 쓸려나가고 지금은 ‘一’자 형의 안채만 남아있습니다. 마을을 감싸며 흐르는 낙동강이 집 앞에 있으니 큰 홍수로 인해 피해를 입었는가봅니다. 한 건물인데도 사랑방과 안방 사이에 작은 토담을 세워 사랑손님과 안채의 부녀자가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해 두었습니다. 조선시대 아녀자들의 공간과 남성들의 사용공간을 구별해 둔 것은 양반가옥에서는 필수 규칙이었던 셈입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나는 문화이다. 마을지도를 펼치고 양진당과 충효당이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양진당 앞 널찍한 공간에 전동차를 세워두고 충효당으로 갔습니다. 역사동아리에서 답사 온 사람들이 해설사를 동행하며 해설을 듣고 있었습니다.

    충효당은 보물 제414호로 지정된 집입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으로, 평생을 청백하게 지낸 선생이 삼간초옥에서 별세한 후 그의 문하생과 지역 사림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졸재 류원지를 도와 건립하였습니다. ‘忠孝堂’ 이라는 당호는 선생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대문 앞 정원에 1999년 4월 엘리자베스2세 영국여왕이 이 마을을 방문한 기념으로 심은 구상나무가 튼실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2019년 5월 요트공 앤드루 왕자 방문을 기념하는 안내문이 나란히 서서 지나가는 길손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먼 나라 영국왕실에서 이곳을 방문했으니 과연 세계 속의 한국을 대표하는 곳이 안동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충효당 안으로 들어가 서애선생의 체취를 느끼며 이곳저곳 둘러보았습니다. 전시실에 들러 선생의 발자취를 다시 느끼며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 나와 양진당으로 갔습니다.


    ▲ 작천고택  (좌) /  충효당 (중) / 충효당 전시실 (우)

    양진당은 보물 제306호이다. 풍산에 살던 류종혜 공이 하회마을에 들어와 15세기 경에 최초로 지은 집으로 풍산류씨 대종택입니다. 양진당‘養眞堂’이라는 현판은 풍산류씨 족보를 최초로 완성한 류영의 호에서 따온 것이며, ‘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은 겸암 선생과 서애 선생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의 호에서 따온 것입니다.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 집을 둘러보았습니다. 과연 저택이다 싶었습니다. 이런 큰 집에서 대가족을 보살폈던 여성들의 삶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참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당연한 삶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양반가 조선여인의 단아함과 매서움도 알듯했습니다. 조선여인의 마음으로 집안을 살피고 마을을 둘러보았습니다.
    골목에 있는 이정표를 따라 신목을 뵈었습니다. 삼신당 신목은 수령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이며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마을의 가장 중앙에 위치하며 마을사람들의 소망을 비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아기를 점지해 주고 출산과 성장을 돕는 신령스러운 나무로 여깁니다. 매년 정월 대보름 이곳에서 마을의 평안을 비는 동제를 지냅니다. 또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신령스러운 나무 앞에 서니 저절로 두 손이 모아졌습니다. 내 마음 속에는 옛 선조들이 숭배했던 전통신앙이 잠재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사람보다 훨씬 오랜 기간 이 땅을 지키며 살아왔고 또한 수호할 것이니 숭배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목에 합장하고 나와 화경당 가는 길에 아담한 기념품가게를 만났습니다.


    ▲ 양진당 (좌) / 삼신당 신목 (우)

    다양한 탈과 열쇠고리 등 자그마한 기념품들이 길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찾아오는 길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웃는 표정의 탈들이 나그네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작은 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이매 탈처럼 웃어보았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화경당으로 향했습니다. 화경당(和敬堂)은 수리 중이었습니다.
    화경당(북촌댁)은 국가민속문화재 제84호입니다. 화경당은 ‘和’로 어버이를 섬기고, ‘敬’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의 이름입니다. 210여 년 동안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으로 베풂과 선비로서의 학식과 기품을 보존하는 류씨집안의 고택입니다. 대대로 낮은 소작료로 소작인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홍수해 때에는 사재를 털어 이웃을 도왔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797년에 류사춘이 사랑채, 날개채, 대문채를 짓고, 1862년에 그의 증손자 류도성이 안채, 큰사랑채, 사당을 지었습니다. 집의 규모가 웅장하고 대갓집의 격식을 완벽하게 갖추어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한데 수리 중이라 안으로 들어가서 둘러볼 수 는 없었습니다.


    ▲ 기념품 가게 (좌) / 공사 중인 화경당 (우)

    북촌댁 앞을 서성이다가 골목길을 돌아 만송정 솔숲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천연기념물 제473호로 지정된 소나무 숲이 강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거닐며 부용대도 바라보았습니다. 깎아지른 기암절벽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장관이었습니다. 자연의 오묘함과 신비스러움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산책로를 걷다가 전동차를 타고 다니다가 또 걸어 다니며 온종일 둘러보아도 끝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돌아 나오는 길 목화밭을 만났습니다.


    ▲ 부용대

    ▲ 목화밭 (좌) / 탈박물관 (우)

    목화밭 길을 따라 나와 빌린 전동차를 돌려주고 셔틀버스를 타고 마을에서 나와 탈박물관에 들러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모습의 탈을 관람했습니다.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의 가을은 유교를 숭상하던 선비들의 자태를 닮아있었습니다. 푸르른 잎을 모두 떨군 초목들과 추수 끝난 들녘과 그 위로 일렁이는 바람까지. 조선 선비들의 정신이  강물처럼 흐르는 듯 했습니다.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도 스쳐 지날 수 없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으며 기품이 느껴지는 조선 양반가의 여인도 그려 보았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수백 년 전 사람이 살았던 미로 같은 마을길을 다니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Info. 관람 안내
    •문화관광해설·통역안내 ☎(054) 840-3803
    •하회마을관광안내센터 ☎(054) 852-3588
    •안동축제관광재단 ☎(054) 856-3013
    •안동하회마을관리사무소 : 안동시 풍천면 전서로 186-8 ☎(054) 854-3669

       사랑, 그 애틋한 편지

    하회마을에서 임청각으로 가다가 원이엄마 테마공원에 들렀습니다. 원이엄마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었습니다. 숨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적어 관속에 함께 넣었습니다. 그녀는 고성이씨 이응태(1556~1586)의 부인이었습니다. 1998년 정하동 택지개발을 할 때 현 위치에서 약 500m 떨어진 곳(현진에버빌 104동 서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편지 내용은 원이엄마가 병환중인 남편(이응태)을 낫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대마)줄기로 신발(미투리)을 삼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끝내 어린 아들과 유복자를 두고 세상을 떠나자 그 안타까운 마음과 사모하는 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로58.5cm, 세로34cm 크기의 편지는 한지에 한글 고어체로 쓰여진 것으로 다른 출토유물들과 함께 안동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무덤은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로 이장하였습니다.
    400여 년 동안 썩지 않은 주검과 편지, 총 18통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원이엄마 편지>는 예외였습니다. 한글로 쓰인 이 편지는 이응태의 시신처럼 보존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테마공원에는 원이엄마의 애절한 편지를 돌에 새겨 설치했습니다. ‘원이 아버님께 올림-병술년 유월 초하룻날’이라고 시작하는 <원이엄마 편지>에는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내의 슬픔과 사랑이 구구절절 담겨있었습니다.

    당신 늘 나에게 말하기를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 원이엄마테마공원

    원이엄마 편지를 바탕으로 소설 [능소화]가 창작되었으며 월영교 부근에도 원이엄마의 그 애틋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산책 할 수 있는 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그 그윽한 사랑은 어찌 글로 표현이 될까요. 사랑, 그 영원한 주제를 가슴에 안은 채 임청각으로 갔습니다.

    Info. 원이엄마테마공원
    주소 : 경북 안동시 정하동 236-1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며

    원이엄마 테마공원에서 약 5분, 하회마을에서 임청각까지 약 30분 소요됩니다. 안동댐으로 가다가 길가에 안동 보조댐이 있고, 그 부근에 임청각이 있습니다. 이 고택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을 비롯하여 모두 13명의 독립유공자가 있는 곳입니다. 특히 임청각에서만 9명의 독립유공자가 탄생했습니다.
    임청각 사람들은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었으며, 1909년 봄부터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이끌면서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하였습니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이듬해 이상룡과 동생 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종숙 이흥화는 모두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들은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를 이끌며, 만주 항일투쟁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나라 안에서는 문중의 이종영이 대한광복회에서 활약하였고, 이상동·이승복·이을성은 3·1운동, 이종국은 1921년 의용단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 밖에도 서훈을 받지 못한 많은 인물들이 항일투쟁의 대열에 있었습니다.
    임청각은 사랑채의 당호로, 별당인 군자정과 나란히 지형에 따라 펼쳐져 있습니다. 임청각 바로 앞에 철길과 도로가 놓이면서 본래의 규모보다 많이 줄었습니다. 들어가는 길도 좁아 방문하기에 다소 불편했습니다.


    ▲ 임청각 입구 (좌) / 임청각 보물 제182호 (우)

    ▲ 임청각 (좌) / 군자정 (우)

    오늘날이 있기 까지 잊어서는 안 될, 독립운동가의 집안을 둘러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후손들이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깊었을까요, 기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습니다. 더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숙연한 마음으로 집안을 둘러보았습니다. 해가 저물어 하루가 고요히 어둠에 젖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에 올라 고성이씨 종택도 바라보고, 법흥리 7층전탑도 살펴보았습니다.

       굉음에 시달리는 법흥사지 칠층전탑

    ‘신세동 칠층 전탑’이라고도 합니다. 통일 신라 시대 벽돌로 만든 탑으로 우리나라에 있는 벽돌 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입니다. 높이 16.8m, 기단 폭 7.75m이며 방형(方形)의 기단 위에 팔부신중을 양각하고 각 층의 탑신은 회흑색 벽돌로 쌓았습니다. 정식 명칭은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이며 국보 제16호입니다. 8세기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탑 이외의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안내문에는 ‘현재 이 터에는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이 있다.’라고 하며, 비석에는 ‘안동신세동칠층전탑’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 고성이씨 종가와 전탑

    일제강점기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또 기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습니다. 몸을 움츠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철길아래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했으며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웅장하며 장엄했을 탑입니다. 탑기단에 조각된 팔부신중들은 시커멓게 변해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마음이 우울해졌습니다.

    Info. 고성이씨종가
    주소 :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63(법흥동 20-3) | 대표 : 이항증
    예약전화 : 054-859-0025 | 이메일 : kingma22@hanmail.net

       달그림자가 머무는 다리, 월영교

    월영교란 이름은 댐 건설로 수몰된 월영대가 이곳으로 옮겨온 인연과 월곡면, 음달골이라는 지명을 바탕으로 하여 주민들의 의견을 거쳐 지어진 이름입니다. 낙동강을 감싸고 있는 산과 댐으로 이루어진 울타리 같은 지형이 밤하늘에 뜬 달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늘에 뜬 달과 강물에 내려앉은 달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월영교는 자연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거니와 먼저 간 남편을 위해 아내가 머리카락으로 만든 한 켤레 미투리 모양을 형상화 한 다리입니다. 그들의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을 영원히 이어주고자 이 다리를 만들었답니다.
    안동을 여행하면 거의 빠뜨리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주차장과 식당이 많을 뿐만 아니라 강변 산책길이 아름다워 관광객들이 즐겨 찾습니다. 
    호반나들이길, 700리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안동댐 보조호수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맑은 물을 활용한 자연친화적인 산책로입니다.


    ▲ 월영교 야경

    달그림자가 비치면 더 없이 은은하고 화려한 다리, 몇 번이나 이곳을 다녀왔지만 야경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리 건너편에는 석빙고와, 민속촌이 있으며 호반 길에는 ‘왓니껴다리’와 ‘떡고개 다리’도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을 거닐며 예와 충을 실천한 선비들의 삶과 아름다운 사랑을 되새겨보았습니다. 저물 녁 월영교에 이르러 낙동강의 붉은 노을도 바라보고, 야경을 감상하며 안동의 특미를 맛보았습니다. 간고등어 정식으로 저녁을 먹으며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 원이엄마테마 길

    물에 비친 월영교가 달빛에 젖어 금빛으로 찰랑거렸습니다. 상현달이 비치어 아름다움이 더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가벼운 찰랑거림과 고요함이 동행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온종일 안동에 머물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금세 하루가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Info. 월영교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상아동
    문의 및 안내 : 054-852-6800
    관련 홈페이지 : http://www.tourandong.com

    이순영 경북여행작가의 11월 여행기입니다.

     

    태그
    #경상북도 #경북 #경북여행 #경북나드리 #안동 #안동여행 #안동가볼만한곳 #안동여행코스 #병산서원 #안동하회마을 #원이엄마테마공원 #임청각 #법흥사지 #월영교 #안동야경 #걷기좋은곳 #겨울여행 #가을여행 #주말여행 #힐링여행 #가족과함께 #연인과함께